덕천군 (왕족)
덕천군
德泉君 | |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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군(君) | |
이름 | |
휘 | 이후생 李厚生 |
별호 | 적덕공(積德公) |
신상정보 | |
출생일 | 1397년 |
출생지 | 조선 한성부 |
사망일 | 1465년 12월 7일 (양력) (향년 69세) |
사망지 | 조선 한성부 |
정당 | 무소속 |
왕조 | 조선 (朝鮮) |
가문 | 전주 이씨 |
부친 | 정종 (조선) |
모친 | 성빈 지씨 |
배우자 | 고택군부인(高澤郡夫人) 장수 이씨 그 외에 첩실 1명 |
자녀 | 슬하 4남 6녀 |
기타 친인척 | 도평군(동복 남동생) |
종교 | 유교(성리학) |
묘소 |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태산리 북위 36° 33′ 6″ 동경 127° 11′ 34″ / 북위 36.55167° 동경 127.19278° |
덕천군 이후생(德泉君 李厚生, 1397년 ~ 1465년 12월 7일(음력 11월 10일))은 조선 제2대 정종(定宗)의 10남이자 서10남으로 생모는 성빈 지씨이다. 시호는 적덕(積德)이다.
생애
[편집]덕천군은 조선 제2대 국왕 정종과 성빈 지씨 사이의 열째 왕자로, 1444년(세종 26년) 명선대부 덕원정(德原正)에 봉해졌으며, 이후 덕천정(德川正), 또 1460년(세조 6년) 덕천군(德泉君)으로 봉군되었으며, 왕자의 신분임에도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였고, 그는 가난한 이웃을 지성으로 도왔으며, 어느 해 여름에 홍수로 금강이 범람하였다. 그 때, 덕천군은 수백 명의 이재민들을 구제하였다. 그래서 덕을 쌓은 어른, 적덕공(積德公)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한다.[1]
사후
[편집]초장지(初葬地) 묘소는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거암리/거여리(廣州郡 中臺面 巨岩里/巨餘里, 현재 송파구 거여동/마천동) 남한산성 서문(西門) 앞에 있었는데, 이 지역이 군용지로 편입되면서 1974년 현재 사당이 있는 세종시 장군면 태산리 문중의 묘역으로 이장하고 석물(石物)도 그대로 옮겨 세웠다. 이듬해 1975년에 서울에서는 행정구역 개편으로 송파구를 분리하여 강남구가 신설되었다. * 초장지(初葬地), 고지도 (한국학자료포털), 북위 37° 29′ 4.8474″ 동경 127° 10′ 33.6714″ / 북위 37.484679833° 동경 127.176019833° 사우(祠宇, 사당);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세워졌으나, 1739년(영조 15)에 사당이 낡아 개보수, 중건을 하는 과정에서 현재위치(세종시 장군면 태산리) 문중 선산 근처로 옮겨졌다. 신도비(神道碑)는 양명학 강화학파(江華學派)의 거두(巨頭)이고 육진팔광의 한 사람이며, 서예가로서 동국진체(東國眞體) 원교체(圓嶠體)를 남긴 10대손 원교 이광사(圓嶠 李匡師)가 짓고 썼으며, 1808년(순조 8)에 건립되었다.
유지(遺志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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” |
— 덕천군유지해설비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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가족관계
[편집]- 조부 : 조선 태조
- 조모 : 신의왕후 한씨
- 부왕 : 조선 2대 국왕 정종
- 외조부 : 찬성사(贊成事) 지윤(池奫)
- 외조모 : 순흥 안씨
같이 보기
[편집]- 대한 조경단 (大韓 肇慶壇)
- 준경묘·영경묘 (濬慶墓·永慶墓)
- 경기전(慶基殿: 조선 태조 어진) (太祖御眞)
- 건원릉(健元陵: 조선 태조)
- 제릉(齊陵: 조모 신의왕후), 황해도 개풍군 대련리(大蓮里), 북위 37° 53′ 47.4936″ 동경 126° 33′ 24.2958″ / 북위 37.896526000° 동경 126.556748833°
- 후릉(厚陵: 부왕 정종과 정안왕후), 황해도 개풍군 흥교리(興敎里), 북위 37° 50′ 1.017″ 동경 126° 32′ 3.1488″ / 북위 37.83361583° 동경 126.534208000°
- 육진팔광(六眞八匡)
- 강화학파 육대계승 (六代繼承), 약 250 여 년간.
- 《전주이씨 덕천군파 종택 간찰》(簡札, 편지, 한말시기) (한국학중앙연구원 편)
- 지은이, 이광호, 김병선, 김태환 (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및 책임연구원)
- 펴낸곳, 태학사 (초판발행일.2009.12.5.), 국제표준도서번호 ISBN 978-89-5966-364-4 94810
- 덕천군묘출토분청이부호
참조
[편집]- ↑ 덕천군 신도비